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는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여러 가지 위험이 동반되겠지만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첫 번째는 대표를 선출하고 난 다음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다. 선출된 대표를 적절하게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단과 절차를 마련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을 위임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의례적 절차로 전락시킬 수 있다. 파워엘리트의 권력 독점을 민주주의라는 멋있는 이름으로 승인해 주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위험은 선거 과정 자체에 도사리고 있다. 대표를 자임하는 후보들, 그들이 속한 정당이나 세력이 가진 생각과 정책들이 오랜 시간 곱씹어 토론되고 비판되는 과정이 없다면 선거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낡은 연줄과 당장의 이익을 공유하는 패거리들 간의 협잡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대학은 대표를 뽑을 수 있는 권리를 회복했다. 싸우지 않고 권력의 눈치만 보다가 다른 이들의 투쟁에 무임승차하는 것이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제주대학교의 총장을 직접 뽑을 수 있는 권리를 되찾은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다시 되찾은 권리가 ‘직접선거’는 맞는 걸까? 총장을 선출하고 난 후, 반영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의견수렴’ 말고는 대표를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는 잠시 덮어두자. 쉽게 해결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말이다. 지성인을 자처하는 대학교수들이 여전히 지연과 학연에 매달리고, 대학 발전이나 교육의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현실도 잠시 잊자. 자신들에 대한 도덕적 기대치가 매우 낮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교수들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교수를 100으로 놓고 보았을 때 교직원에게는 13퍼센트, 학생에는 4퍼센트, 조교에게는 2퍼센트의 비율로 투표권을 주는 선거를 어떻게 직접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학의 주인이 교수라고 둘러대기에는 많이 쑥스럽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교수와 학생의 관계를 서비스제공자와 고객의 관계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자신들만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속이 너무 뻔히 보인다.

그러면 학생은 아직 미성숙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면 대학원생은 어떤가? 학부생들보다 비싼 학비를 내지만 제대로 된 서비스조차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제주대학교의 대학원생들은 왜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는 걸까? 학연과 지연에 휘둘리고 작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거창한 말들의 상찬을 벌이곤 하는 교수들보다 그들의 민주적 역량이 부족하지는 않을 게다. 민주주의는 모든 구성원의 의견이 표출되게 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더 잘 들리게 할 때만 꽃필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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