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은 모두를 끌어당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용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력과는 다르게 인간을 끌어당기는 또 다른 힘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에로티즘이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자연재해처럼 세상을 뒤집어 놓지는 않지만, 에로티즘은 인간의 감정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또한 치명적인 에너지이며, 때에 따라선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 사소한 사건과 우연을 통해 에로티즘은 발현된다.

대개 ‘사건’은 엉뚱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건 상대의 신분, 나이, 사회적 지위 등에 구애받지 않는다. 중력은 보편적인 힘이며 객관적인 수치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데 비해, 에로티즘은 개별적이면서도 독특한 감정이며 이 개별적인 경험을 포괄하는 고상한 언어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에로티즘이 치명적인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욕’에 국한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에로티즘은 언제나 상대에 대해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동반한다. 어쩌면 성적인 기능으로서의 에로티즘은 공허하다.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점, 거기에 은밀하고도 진한 ‘감정’이 있다. 사랑은 에로티즘을 전제로 한다.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드러내는 것이 에로티즘이다.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내 존재는 초라해지고 볼품없어진다. 자신을 부정하면서까지 상대를 쟁취하려는 에너지, 그것을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이라고 정의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 치명적인 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감정은 세상에 유일하다. 감정은 상대가 끌어당기는 특수한 마력에 요동친다. 한 인간은 이 감정을 혼자 감내해야만 한다. 사랑은 그런 사유와 고뇌 속에서 싹트는 유일무이한 감정이 전제되어야만 성립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사랑은 어떤가. 우리는 너무도 감정을 절제한다. 행여 자신이 부끄러운 감정이 드러나면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날까 봐 무서워한다. 우리의 몸을 상대에게 던지지 못한다. 위험을 감수하지 못한다. 상대방을 떠올리면서도 이해득실을 저울질한다. 합리적이면서도 삭막하고 견고한 이 세상에 상대를 향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이란 어리석은 사치가 되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포기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한 걸까?

이 시대의 에로티즘이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닌지 한 번 쯤 다시금 자문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이유는 없다. 사랑의 조건은 없다. 각박한 세상에 대한 저항정신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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