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Ⅱ 기획전시 관람기

◇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

아라리오뮤지엄의 다섯 번째 전시공간 동문모텔 II는 동문모텔 I과 더불어 제주 구도심의 최대 번화가였던 동문 재래시장과 제주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산지천 사이에 자리했던 모텔들을 인수하여 문화시설로 개축한 현대미술관이다. 산지천은 물이 귀한 제주에서 가장 큰 용천수가 솟아나는 하천이자 항만물류의 중심으로 주택과 상가들이 조밀하게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신도심 개발과 항공교통의 발달로 산지천 일대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효용가치가 낮아진 모텔은 지난 10여년간 방치됐다. 동문모텔 I과 동문모텔 II는 산지천의 옛 기억이 묻어있는 기존 건물의 흔적들을 보존함과 동시에 현대적인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과거 여정에 지친 사람들의 휴식처였던 모텔들은 이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탈바꿈되어 산지천 일대에 새로운 문화적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 과장의 이야기 - 아빠왔다

<별이 되다>는 폴리코트에 야광 안료를 섞어 만든 약 1천개의 샐러리맨 조각들을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설치한 작품이다.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 II에서는 구본주의 개인전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 과장의 이야기 - 아빠왔다>展이 개최되고 있다. 이 전시는 “21세기를 빛낼 조각계의 떠오르는 별”로 불렸으며 1990년대 한국 구상조각의 전성기를 이끌어냈으나 불의의 사고로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조각가인 구본주의 15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기획됐다. 전시 제목 <아빠 왔다>는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현관에 들어서서 가방을 내려놓고 구두를 벗으며 긴 하루의 끝에 뱉어내는 첫 마디에서 가져왔다. 전시장 네 개의 층은 각각 《사는 게 뭔지》, 《노동자의 깃발은 무엇으로 지켜지는가》, 《이 과장의 40번 째 생일날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너의 느낌, 그것이 진실이다》로 이어지는 소주제를 통해 ‘이 과장’이라는 익명의 개인이 직장, 사회, 가족 안에서 겪는 하루를 묘사한다. 

◇ 흘러가버린 아버지의 청춘과 힘겨운 시기를 견디는 청춘에게 보내는 메시지

구본주의 작가 노트 중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 있다. ‘아버지가 된 그들은 절대적 대안으로 작아진다. 아내 앞에서, 자녀 앞에서, 직장에서… 한없이 그는 작아지고 작아진다. 비쩍 마른 나무들 속에서, 턱이 날아갈 듯 벌린 입 속에서, 또 절대 무너짐이란 없을 것 같은 육중한 철판의 텅 빈 양복 속에서, 나는 사회적 퇴물,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본다.’ 작가 노트에 나온 것처럼 구본주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고독한 존재로 묘사한다. 작품 어디에서도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없다. 회사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구석에 숨어 담배를 피우는 샐러리맨, 구겨진 양복과 축 처진 어깨, 마른 다리로 일을 하고 동료들과 소주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퇴근길에 전봇대에 서서 오줌을 싸는 이 과장의 초상은 모든 아버지들의 주름진 시간이고,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까지도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소시민의 애환을 유머러스하고도 통쾌한 필치로 그려낸 구본주의 작품 전반을 회고함으로써 이미 흘러가버린 아버지의 옛 청춘과 오늘날 힘겨운 시기를 견디고 있는 지금의 청춘 모두에게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전한다.

◇ 천개의 샐러리맨, 별이 되다

구본주의 유작(遺作)인 <별이 되다>는 폴리코트에 야광 안료를 섞어 만든 약 1천 개의 샐러리맨 조각들을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설치한 작품이다. 작가는 천 개의 불상을 제작하고자 하는 신념으로 하나 하나의 조각에 정성을 담아 각각 다른 형상의 샐러리맨으로 제작하고자 했으나, 단 3개의 조각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작품은 사후 유족과 제자, 그를 사랑한 동료들에 의해 캐스팅한 조각으로 완성됐다. 4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전시장을 가득 채운 설치 조각품들에 압도당한다. 캄캄한 전시장 안에서 빛을 뿜는 개별의 조각품들은 멀리서 보면 똑같아 보이는 샐러리맨들이 양복을 입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길을 돌고 돌아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들은 양 다리가 찢어질 듯 달려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가까이서 보면 같은 샐러리맨들은 없으며, 모두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 다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같은 이들은 없다. 각자의 사정을 가진 아버지들은 앞사람이 가는 곳을 따라갈지라도 그 순간 최선을 다해 다리가 찢어질 듯 달려가 이 시대를 밝히는 별이 되었다. 

◇ 이 과장의 40번째 생일날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

5층 전시장의 작품 〈Mr.Lee〉는 도심을 향해 나 있는 창을 향해 달려가는 남자의 모습이 아래층의 작품 <별이 되다>의 샐러리맨들과 비슷하게 보인다.

맨 위층으로 올라가면 <이 과장의 40번째 생일날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라는 주제로 구성된 마지막 전시장이 나온다. 혁명가, 예술가, 샐러리맨, 아버지, 남편 등 한 인간이 가진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이 전시장에서는 커다랗고 역동적인 작품 미스터 리 Mr.Lee가 눈에 띈다. 도심을 향해 나 있는 창을 향해 달려가는 남자의 모습이 아래층의 작품 <별이 되다>의 샐러리맨들과 비슷하게 보인다. 양 다리가 찢어질 듯 달려 어디론가 가던 천 명의 샐러리맨들이 향하던 곳이 도심 속이었을까? 소제목으로 보아 오늘은 이 과장의 40번째 생일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한 사회의 혁명가로서, 예술가로서, 한 회사의 샐러리맨으로서,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이 과장은 도심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과장은 또 다시 돌아 거리로, 작업실로, 회사로,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과장은 그걸 알기에 다리가 찢어질 듯 달려간다. 아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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