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도 때로는 특별함이 돼
하나의 키워드에도 반응 갈려
선택의 영역을 생각해 봐야

필자는 세포나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오랜 기간 연구를 진행하며 잊혀 지지 않는 몇 가지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대학원생 시절에 경험한 것이다.  그날은 실험용 쥐의 태아 세포를 키우는 실험을 진행 중이었는데, 세포 배양 접시 속에 있는 여러 세포 중 어느 한 세포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고요한 다른 세포들 사이에서 마치 숨을 쉬듯 콩닥이고 있는 점이 특이했는데, 바로 심장 조직을 이루는 세포였다. 마치 현미경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세포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생명의 작은 미립자 세포가 내뿜는 에너지는 신비로웠다.  며칠 동안 새벽까지 이어지던 실험에 피로감은 묵직했으나 그날 발견한 신비한 생명은 피로를 잊게 할 만큼 새로운 에너지를 전해주었다.  평범한 일상 중의 한 경험이,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장면으로 각인된 것이다.  무심히 지나갈 수 있는 사건이 개인의 반응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기억되고,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사회적 담론으로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오사카의 샌프란시스코와 자매도시 결연 파기 선언과 ‘여성폭력철폐의 날’(11월 24일)을 맞아 도쿄에서 켜진 촛불은 하나의 키워드를 두고 한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반응을 보인 사건이다.  키워드는 ‘위안부 문제’이며, 전자는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위치한 세인트 메리 스퀘어 공원에 ‘위안부 피해 소녀상’이 설치된 것에 반발해 오사카 시장이 샌프란시스코와의 자매도시 결연 파기를 선언한 것이고, 후자는 소수의 일본 시민들이 도쿄의 번화가 시부야역 앞에 모여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역사와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연 것이다.

일본 사회 내에서는 비록 다수와 소수의 대립이기는 하겠지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하나의 키워드이나, 키워드를 받아드는 주체의 반응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 반응은 개인에게 원초적이며 불가역적인 것으로 작동하는 것일까.

우리가 처하는 외부 상황과 자신의 내면 사이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우리가 처한 외부 상황을 향하여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반응을 멈추고, 주도권을 잡고 반응할 수 있는 선택의 영역으로 주어져 있다.  그 공간을 지켜내고 운신하는 방식에 따라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게 되고, 그렇게 매일매일 쌓은 삶이 그가 속한 세계의 모습을 결정한다.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이라는 반응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먼저 역사와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것’이라는 반응의 차이는 결국 외부 상황과 자신의 내면 사이에 있는 특별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공간을 운신하는 방식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첨예한 입장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이 되고, 그가 속한 세계의 모습을 일구어 나갈 것이다.

자주 딸아이가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준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원인이 되는 사건 후에, 결과로서 딸아이의 반응도 듣게 된다.  그럴 때면 사건에 대한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을 멈추고, 주도권을 잡고 반응할 수 있는 선택의 영역으로 주어진 아이의 그 특별한 공간이 궁금해지곤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타인에게보다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종종 처하게 되는 외부 상황과 내면 사이에는 득달같은 반응을 멈추고 주도권을 잡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지금 내게 있는가, 그 공간을 잘 지켜내고 있는가, 그 공간을 운신하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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