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뜨거웠던 아라캠퍼스를 돌아보다
직선제 개헌 위한 민주화 열기
4ㆍ3대자보 지역사회에 큰 영향
퍼스 투쟁 벗어나 시민과 합세
정권교체 실패로 학생들 실의

1987년 제주대 진입로에서의 치열했던 순간들. 학생들이 전경들에 맞서 시위를 하고 있다.

1987년은 전국적으로 가장 시위가 많았고 격렬했던 한 해였다. 특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한 민주화 요구의 열기가 매우 뜨거웠다. 대학 캠퍼스에서도 같은 맥락의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총학생회 재선거가 실시돼 운동권 진영의 새 집행부가 구성된 데 이어 4·3대자보 사건이 터지면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6월 항쟁의 열기로 이어졌다.

1987년 4월 3일 총학생회·여학생회·사회과학대학 학생회 명의로 제주4·3사건에 관한 대자보가 나왔다. 이와 관련, 2명이 경찰에 연행되자 총학생회는 16일 ‘4·19민주혁명계승대회’를 갖고 연행 학생 석방과 전년도 11월의 부당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집단 시위는 시작됐다. 

17일에는 500여 명의 학생들이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여기서 중간고사 거부가 결정됐다. 이날 밤 연행학생이 석방됐으나, 18일 오후 2시에는 1000여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학원자율화투쟁 경과보고대회가 열렸다. 이에 19일 교수들이 전체교수회의를 열어 중간고사 강행을 결의했지만, 20일에는 90% 이상의 학생이 중간고사를 거부하면서 ‘시험거부투쟁 제1차 경과보고대회’에 3000여 명의 학생이 참석해 교내시위가 벌어졌다. 매일 1000∼20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벌이는 상황이 이어지던 중 23일 오후 5시 30분께 150여 명의 학생들이 ‘부당징계 철회’, ‘지명수배 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며 총장실을 점거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학교당국은 다각도로 방안을 강구하던 중 수습위원회를 구성하게 되고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타협안을 모색한 결과, 부당징계 철회와 복교 방안, 시험 거부에 따른 사후 문제에 대해 타협을 봄으로써 25일 오전 11시 30분께 점거 농성을 풀고 해산했다. 중간고사는 기간 연장 형식으로 재차 치러졌다.

당시 주로 학원자율 쟁취를 목표로 했던 학생운동진영은 5월 이후에는 호헌철폐와 광주문제 진상규명 등의 정치민주화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5월 18일에는 1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광주사태 추모제’를 가졌으며, 6월이 되면서 시민사회 세력과 함께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다. 

6월 8일 ‘이한열 열사 추모제’를 시작으로 10일에는 학생회관 앞에서 총학생회 주최로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대토론회를 개최하고 ‘4·13호헌철회, 현행 헌법 개정, 민주헌법 쟁취’를 다짐했다. 제주시민들과 연대한 제주지역의 6월 항쟁은 21일부터 시작된다.

21일 오후 1시경 일부 학과가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300여 명의 학생이 시내까지 비폭력으로 행진했다. 오후 3시경에는 남문로터리에서 시민 등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범도민시국 토론회’를 각각 열고 ‘민주헌법 쟁취’, ‘호헌 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제주시청 앞 민정당사까지 가두행진을 한 뒤 오후 7시께 광양로터리에서 자진해산했다.

22일 전학과가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2,000여명의 학생들은 오후 시내에서 가두행진을 하고 중앙로터리에 재집결한 후 ‘범도민 시국대토론회’를 열었다. 그 후 100여 명의 학생들은 밤늦게 중앙성당으로 옮겨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23일에는 중앙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는 학생들과 합류하기 위하여 출정식을 갖고 교수아파트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당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했다. 밤 9시께 동문로터리에서 중앙로 방면으로 학생 2000여 명과 시민 10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하여 구호를 외치다가 몸싸움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고 비폭력 행진으로 중앙성당에 도착하여 농성자와 합류했다. ‘시국토론회’를 열고는 연행학생 석방을 경찰 측에 요구하다가 밤 1시 20분께 연행자 전원이 석방되자 농성을 풀고 해산했다. 

24일 오후 5시께 학생·시민 등 500여 명은 중앙성당에 모여 26일 열릴 ‘범국민평화대행진’의 강행을 결의하고 ‘군사독재종식과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도민 민주화 투쟁일지’를 시내 곳곳에 부착한 한 후 해산했다. 26일 학생 600여 명은 중앙로·남문로터리를 점거해 농성을 벌였으며, 오후 7시께에는 7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민과 학생들이 중앙로터리에서 광양로터리까지 평화대행진을 했고, 새벽 1시 30분까지 시국대토론회를 벌이다 해산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항쟁에 굴복해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기나긴 싸움이 일단 정리됐다.

이후 7월 11일에 있었던 ‘고 이한열 열사 추도 및 살인 정권 규탄대회’에서 한 여학생이 눈을 부상당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17일 ‘폭력 추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통일민주당사에서의 농성, 24일 통일민주당 진상조사단 내도, 25일 경찰 측과의 회담, 26일 공동기자회견 등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1987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됐다. 이는 총장퇴진투쟁으로 번졌다.

9월 14일에는 ‘학원민주화 투쟁 선포식 및 좌경용공조작 규탄대회’가 학생회관 앞에서 열려 학원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학내의 비민주적 요소들을 척결하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하고 교내시위를 벌인 뒤 총장과의 간담회를 가졌다. 

9월 28일 학생회관 앞에서 ‘어용 총장 퇴진 및 문교 5원칙 완전 철폐를 위한 실천대회’를 열고 난 뒤 교내 시위가 있었으며, 오후 3시 30분 총장실을 점거하고 총장이 퇴진할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29·30일 이틀에 걸쳐 오전 8시부터 교문을 차단하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10월 내내 각종 시위로 학교는 어수선했다. 10월 30일 중강당에서 전체 교수 회의를 열고 학원사태에 대한 학교 당국자의 설명을 듣고, 소위원회를 구성, 정상화를 위한 결의문을 작성했다. 11월 2일 다시 전체교수 회의를 열어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11월 10일 ‘총장퇴진’ 요구를 하며 장기간 끈 학원민주화 투쟁은 44일 만에 학생대표와 중재교수 간에 총장퇴진, 보직교수 책임, 시위 관련 학생들의 불이익 문제와 학칙문제 등에 관한 합의가 이뤄져 일단락됐다. 이에 따라 총장은 1988년 2월 5일 사표를 제출했지만, 반려됐다.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진영 후보의 단일화 실패로 정권교체에 실패하면서 학생운동은 잠시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1988학년도 개강 이후 지역운동과 통일운동 등을 계기로 지속적인 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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