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 언기 자

‘너 나 알아? 왜 다짜고짜 욕질이야?’ 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황당한 일이다. 하지만 이 황당한 일이 매초매분 이뤄지고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네트워크 커뮤니티’다. 범인의 이름은 ‘익명’이라 한다. 익명이 보장되는 곳에서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개싸움’이 시작된다. 심할 경우 고소까지 불사한다.

우리 대학도 여러 커뮤니티를 가지고 있다. 그 중 ‘에브리타임’이 가장 활발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커뮤니티는 건강할까? 그런 것 같지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학우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악플(악성 리플)이 보인다. 문제는 공격성이 있는 글이 아닌 곳에도 악플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름도, 닉네임도, 그 어떠한 정보도 모르는 사람에게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한 때 ‘에브리타임’의 익명성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익명의 장점을 단점보다 더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익명은 평소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공유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말하며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또한 익명을 이용한 고발을 통해 성폭행, 직장비리, 갑질 문제가 점차 근절돼가는 사회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익명의 부작용이 장점을 뒤덮어버렸다. 악플은 꽤 오래 전부터 문제였다. 익명과 표현의 자유 뒤에 숨어 거머리처럼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어 왔고 이제 그 심각성은 사회가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사람은 비가 새는 지붕 아래서 살 수 없다. 결국 ‘에브리타임’을 떠나겠다는 사람도 속출하고 있다.

분명 악플이 달리는 글은 평범한 글과 비교해 ‘소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율일 뿐 수많은 글이 오르내리는 가운데 그 양으로 따지면 ‘다수’임에는 확실하다. ‘익명의 장점을 띄는 글이 훨씬 많아’하고 치부할 정도를 넘었다. 욕이 섞인 악플이 아니더라도 부정확한 정보로 사람을 괴롭게 하는 사례도 많다.

혐오가 비판 받는 사회 속 악플은 왜 줄어들지 않는 것일까. 악플러를 검거하고 나면 그들의 주변 인물들의 일관된 반응이 있다. ‘그 착한 사람이 그랬다고?’,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네’.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을 알고 있고 그 반응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소시오패스가 우리 곁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왈가왈부한다고 악플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좀더 강화된 사법적 제재가 입법화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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