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훈 석(87~90년 학생기자)

이름도, 얼굴도 알수 없는 후배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제주대신문 지령 1000호 기념호 발간에 실을 글을 써달라는 것이다. 주제는 과거 대학신문사 재직시절 에피소드. 순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후배들의 애로사항을 30년전 경험했기에 “네”라는 대답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1987년 6월부터 1990년 2월까지 3년간 대학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원고 청탁은 어려운 숙제 중 하나였다. 1학년 수습기자때는 선배들의 지시사항만 이행하면 능력자로 평가됐지만 2학년 정기자로 활동할때는 기사 취재ㆍ작성 못지 않게 3학년 편집장ㆍ부장들이 지시한 원고 청탁의 고통에 시달리기가 일쑤였다. 교수님들이 원고 청탁을 곧바로 들어주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인문대에서 공과대까지 그 가파르고, 먼 거리를 하루에도 몇차례씩 방황해야 했다.

원고 청탁을 들어준 교수님의 “폭탄 돌리기”도 난감했다. 원고 마감일 즈음에 “바빠서 아직…”이라는 대답에 화가 나지만 다음의 원고 부탁 때문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어느 교수님에게 부탁하면 써 줄거라는 말만 믿고 그 교수님을 찾아뵙지만(당시는 핸드폰이 없어서 발품으로) “바쁘다, 일찍 얘기하지. 다음에는 써 줄께”의 질책 섞인 어투에 맥이 풀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원고를 가져가지 못하면 신문 제작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호랑이 선배들의 욕지거리가 두려워 신문사 입구에서 서성일 정도였다.

그래도 구원투수는 있듯이, 원고청탁에 공백이 발생할때마다 밤샘 작업을 감수하면서 글을 써주신 고성준 윤리교육과 교수님 등 몇 분의 응원으로 위기를 넘겼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와 반대로 원고를 제 날짜에 받고서도 대학당국의 외압으로 신문에 싣지 못할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1988년 전국적으로 통일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정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학신문마다 ‘북한 바로알기’ 연재물을 실었다.

제주대신문도 1989년 편집장과 부장들이 의논해 북한바로알기 연재를 결정하고 고성준 교수님을 통해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연구원 등 도외 전문가의 북한 바로알기 원고를 받았지만 제작 과정에서 사라져 대학당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당시 유일한 일간지인 제주신문에서 조판작업을 했는데 대학당국의 외압으로 북한 바로알기 원고의 편집이 사라질때마다 조판 담당자분들이 미리 알려줘서 무사히 독자들에게 기획물을 전달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조판을 담당했던 분들 모두가 회사를 떠났지만 지금이라도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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