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영 만(84~87년 학생기자)

우연히 게시판에 기자 모집 글을 보고 언론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도전하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수습기자가 되면서 고민도 많아졌다. 그리고 전공 공부, 학점 관리, 세계화 시대의 필수 조건인 영어 성적, 아르바이트 등 바쁜 일상과 함께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불안감,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조바심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수습시절은 혼자만 분주하고 바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나 혼자 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신문사에 몸담은 많은 사람이 겪게 되는 과정이자 수시로 해결해야 하는 숙제였음을 기자와 데스크를 맡으면서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아니 선택의 갈림길에 있을때 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명구를 들려주며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준 주간교수님과 선배들의 조언을 들으면서 끝까지 견디자며 스스로 다짐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마음으로 노력했다. 개인적으로는 경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에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간혹 기사 때문에 예를들어 실습비 사용용도 등 때문에 학과 교수님들과 오해가 생기기도 했지만 새로운 취재가 결정되고 그 결과가 활자화되어 독자들에게 읽히고, 그 문제가 개선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학술부장으로 담당 면을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맡게 되면서 얻게 되는 경험도 큰 보람이었다. 그리고 대학신문의 자산은 ‘맨 파워’였다. 비록 아마추어이지만 나름의 언론 및 홍보 베테랑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빛나는 통찰력을 가진 멋진 선배님과 동료가 주변에 많이 있었기에 그들이 일하는 방식, 논리적으로 독자들을 설득하는 과정들 모두가 큰 배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때론 무서우리만큼 차가운 선배들의 질책과 충고도 있었지만 배울 점이 많은 분과 함께 일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또한, 학생기자로서 다양한 학과의 독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에 관한 관심과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매 순간 신문을 발행하면서 선후배 동기들과의 열띤 토론을 벌이고 그들로부터 조언들을 들었으며 그것은 나의 청년기 가치관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그 때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성공적인 3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마지막으로 육지에서 섬으로 유학 온 고학생이었던 나에게 신문 발행을 준비하면서 교정을 보고 늦은 밤 하교길에 학교 정문 앞 ‘소림사’ 라고 불리던 무허가 식당에서 선배님들이 사주던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수북하게 담겨 나온 얼큰한 김치찌개의 맛은 특급 호텔 셰프가 요리한 그 이상의 음식으로 지금도 잊지 못할 행복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나도 제주의 집이 연말에 준공되면 내려가서 그 당시의 선배님들처럼 후배들을 찾아가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격려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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