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작 소감

전예린국어국문학과 4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02’나 ‘070’이었다면 바로 거절을 누르겠지만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 받는 순간, 전화가 끊겨버렸다. 타이밍이 어긋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기다리던 연락이 있던 터라 혹 그것은 아닌가하여 걱정을 하던 중 같은 번호로 다시 연락이 왔다. 기다리던 이의 연락은 아니지만 어쩌면, 속으로는, 은근히 기다리던 것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낸 글이 가작으로 뽑혔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 말이 사실인가 싶으면서도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한 것이어서 전화를 끊고 나니 당선작이 아닌 가작이란 사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받기 전에는 뭐든 주기만 해도 좋겠다고 했으면서 막상 받고나니 더 큰 떡으로 눈이 돌아갔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것을 들이밀며 바랄 것을 바라야지 않겠는가. 그 정도의 염치는 있는지라 순응의 태도로 돌아갔다. 내 글을 뽑아준 것에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어둠이 쏟아지고」에는 현재의 제주도라는 하나의 시간을 주인공의 유년기와 현재로 쪼개어 담았는데, 그것을 좀 더 자연스럽게 담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혹자는 이것을 불친절한 글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어둠이 쏟아지고」를 좋게 봐준 것에 감사를 표하며 가작은 앞으로 더 정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소설 가작

 

                                  어둠이 쏟아지고
                                                                전예린(국어국문학과 4)

1. 서른두 살
“질문 있는 학생 있나요? 없으면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고, 다음 주 시험은 정각에 시작하니까 늦지 마세요. 다들 한 학기 동안 고생했어요.”
종강을 알리는 말에 기뻐하는 학생도 있고 시험을 걱정하며 한숨을 쉬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응이 어떻든 서린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강의 자료를 정리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데 지각한 학생들이 출석을 하기 위해 몰려왔다. 핸드폰을 도로 넣고는 온 순서대로 지각으로 출석 확인을 해주었다.
출석 후 인사를 하고 가는 학생도 있었지만 가끔 학과와 이름을 말하며 제 볼일만 보고 쌩하니 가는 학생들을 대할 때는 기운이 빠졌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서 출석을 다 해주고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마지막 학생까지 출석을 하고 강의실을 나오며 핸드폰으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광고성 메일들 사이로 발신인이 ‘○○대학교’인 메일이 와 있었다. 손끝 지문마다 땀이 배어나왔다. 광고들을 지우고 ○○대학교에서 온 메일을 눌렀다.
복도를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물결 사이로 서린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학생들의 목소리로 가득 찬 복도에 일순간 정적이 흐르는 착각마저 들었다. 서린은 핸드폰 화면을 꺼버리고는 다시 물결을 따라 건물을 나갔다. 주차장까지가 이렇게 멀었나. 매일 신던 구두가 오늘따라 발을 옥죄어 벗어 던져버리고 싶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가방을 조수석으로 던져 놨다. 가방이 조수석 문에 부딪히며 쿵 소리를 냈다. 노트북을 들고 온 걸 깜빡했던 서린이 가방을 다시 고이 눕히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아직 할부가 20개월이나 남은 차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길게 숨을 내쉬고는 차에 시동을 거는데 경쾌하게 시동이 걸리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막내 동생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언니 오늘 결과 나오는 날 아냐? 어떻게 됐어?”
“몰라. 묻지 마.”
“이번에도야?”
“어. 어머니한텐 너가 말해줘. 끊는다.”
“그래. 알겠어. 기운 내.”
아직 대학생인 동생의 목소리는 위로를 하면서도 명랑했다. 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아직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로는 이미 혼잡했다. 30분 거리를 1시간이나 걸려서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지금 사는 1.5룸은 넓진 않지만 그렇다고 좁지도 않아서 혼자 살기에 충분했고 고향집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마음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가방을 식탁에 올리며 침대로 가 엎어지듯 누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확인해보니 항공사의 광고 메일이었다. 그대로 삭제를 하려다가 광고 문구를 눌렀다. 바로 항공사의 홈페이지가 켜졌다. 일본, 중국, 동남아 등 국외 항공권들을 넘기고 국내 항공권 카테고리에서 6월 말의 제주도편을 검색했다. 다행히 표가 꽤 있었다. 주말과 월요일을 피해 적당한 가격대를 골라 예매해버렸다.
방언학 중에서도 제주방언을 전공한 서린은 시간이 될 때면 종종 방언조사를 하러 고향인 제주도에 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사가 때문이 아니더라도 고향집에 가고 싶었다. 서린의 몸에 딱 맞는―정확히는 서린의 몸이 그 집에 맞춰 자란 것이지만― 그 공간에 들어가 그대로 고치가 되어버리고 싶었다. 이번 방언조사의 목적은 연구보다도 휴식 혹은 도피에 가까웠다.
1년 만에 찾은 제주도는 여전했다. 노형에 지어지고 있는 제주도에서 가장 높다는 건물이 시내 어디에서든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서린은 방언조사를 갈 마을은 내일 찾아가보기로 하고 우선 집으로 향했다.
평소 타던 차가 아닌 렌터카를 몰고 있으니 관광객이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살짝 내렸다. 미세먼지 때문에 하늘이 생각만큼 파랗진 않았다. 그래도 왼쪽에 한라산을 끼고 달리니 집에 간다는 게 실감났다.
시내를 빠져나간 지 20분 정도 지나니 저 앞에 고향마을 입구에 있는 하천이 보였다. 그 전까지 들떠 있던 서린의 얼굴에 일순(一瞬) 어두운 빛이 돌았다.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서린은 하천 근처 가게의 주차장에 잠시 차를 댔다.
“무슨 일이야?”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인사도 안 해주는 거야?”
“새삼스럽게 무슨 인사? 바쁘다고 연락도 안 되던 게 누군데.”
“승진이 걸렸는데 바쁜 건 좀 이해해주라. 그나저나 너 어디야?”
“나 오늘 제주도 내려왔어.”
“제주도? 또 무슨 조사인가 뭔가 하러 간 거야?”
“어. 무슨 조사 아니고 방언조사.”
“너 그러지 말고 회사에 들어가는 건 어때? 계속 시간강사만 할 순 없잖아.”
“갑자기 웬 회사야. 그리고 시간강사가 뭐 어때서.”
“아는 친구네 회사에서 인사과 채용을 하는데 회사나 뭐나 괜찮겠다 싶어서, 어때?”
“됐어. 나 운전 중이야. 끊어.”
“야, 그래도 고민을 좀…….”
서린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머리를 식힐 겸 차에서 내려 하천 난간으로 걸어갔다. 전날 한라산에 내린 비로 하천에는 물이 고이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흙탕물이 굽이치기도 하고 작은 소용돌이를 그리기도 했다. LNG 도시가스 파이프가 매설되어 매끈하게 정비된 곳은 흙탕물이 굽이치지 않고 그냥 흘렀다.
수면 아래로 파이프를 덮고 있는 시멘트가 하천 저편에서 서린이 서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을 터였다. 흙탕물은 시멘트 위를 미끄러진 후 다시 굽이쳤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은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부력을 머금었다. 흙탕물의 소용돌이와 함께 서린의 기억도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굽이치며 떠올랐다.

2. 열두 살
어둠이 쏟아지고 침묵마저 잠든 밤, 서린은 가만히 누워 천장에 붙은 야광별을 세고 있다. 하나둘 잘 세다가도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다시 별이 나타나면 어디까지 셌는지를 잊어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세기를 반복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도깨비나 변신하는 너구리 얘기를 해주던 엄마는 막내 동생에게 빼앗겼다. 막내가 태어나자 서린은 둘째 동생 진과 함께 작은 옆방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아빠는 작은 방 천장에 야광별 스티커를 붙여주고 국자 모양으로 북두칠성도 만들어줬다. 서린은 야광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달이 잘 보이는 창문이 마음에 들었다. 마당까지 나가지 않아도 이제는 방에서 달을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달과 별을 보는 것도 금세 지루해져버렸다. 옆에서 진은 이미 곤히 잠이 들어있었다.
“오늘도 악몽을 꾸지 않게 해주세요.”
서린은 꿈을 관장(管掌)한다는 베개요정에게 속삭이듯 말하고 눈을 감았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양 백한 마리, 양 백두 마리……. 삼백, 이백구십구, 이백구십팔, 이백구십칠, 이백구십육…….
양도 세어보고 삼백부터 1까지 거꾸로도 세어봤지만 머리를 써서 그런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어른들이 눈을 감고 있으면 잠이 온다고 하는 말은 순 거짓말이다. 졸려야 잠이 오지 이렇게 정신이 또렷할 때는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다. 어느새 달도 창을 넘어가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새액새액. 진의 숨소리가 들렸다.
서린은 옆으로 돌아누워 방의 모서리, 방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렇게 어둠을 응시하고 있으면 파란 점과 빨간 점들이 나타났다. 작고 수많은 점들이 검은 바탕에서 일정한 방향성 없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쩌면 서린의 눈이 움직여서 점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졸리지 않지만 자야할 때, 오늘처럼 달도 지나가버린 늦은 밤이면 서린은 늘 이 작은 점들을 불러냈다. 깜깜한 밤에는 이 알록달록한 점들을 거의 불러낼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달빛이 드는 밤에는 점들을 보기가 어려웠다.
파랗거나 빨간 점들이 사방에 가득해지자 문손잡이나 책장 한 귀퉁이 어디든 한 곳을 정하고 다시 계속 응시했다. 졸리지 않을수록 정신이 맑을수록 오래 걸리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보고 있던 곳의 주변, 시야의 구석에서부터 이번엔 조금 큰 파란 점과 빨간 점들이 나타났다. 크다고 해봤자 하루살이 정도의 크기지만 바탕처럼 계속 깔려있는 점들에 비하면 큰 편이었다.
큰 점들은 벌떼처럼 모여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린의 눈동자가 왼쪽을 향하면 큰 점들은 오른쪽에서 움직이고 눈동자가 아래로 향하면 큰 점들은 위로 움직였다. 큰 점들이 오른쪽에 있다고 오른쪽을 집중해서 보면 점들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점이 없는 쪽을 보며 곁눈으로 점들을 쫓았다. 집중력이 필요할 거 같은 과정이지만 어둠 속에서 파란 점과 빨간 점이 보이기 시작한 후부터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이 무의미한 과정을 반복하며 서린도 슬슬 잠이 들었다.
점들을 쫓던 눈이 다시 떠졌을 때는 날이 환히 밝아있었다. 부엌에서부터 콩나물국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서린은 천장을 보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천장에는 아직도 별이 가득했다. 서린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서린은 어기적어기적 부엌으로 갔다.
밥상 가운데에는 김이 폴폴 나는 고등어구이가 있고 그 옆으로 오징어젓갈과 백김치, 쌈장, 잘 씻어놓은 배춧잎이 있었다. 먼저 일어난 진은 수저를 놓고 있었다. 서린이 바로 앉으려 하자 엄마가 국을 뜨며 말했다.
“할머니랑 아빠 오시라고 해야지?”
“네.”
서린은 부엌과 마루를 잇는 좁고 짧은 복도를 지나 마루로 향했다.
“진지 잡수세요.”
방에서 불경을 읽고 있던 할머니와 신문을 가지고 들어오던 아빠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읽던 것만 마저 읽고 가겠다며 먼저 가라 손짓했다. 아빠가 할머니를 기다렸다가 같이 부엌으로 왔다. 그 사이 진은 막내가 먹을 분유를 타고 엄마는 아기구덕에서 막내를 안아들었다.
밥을 먹는 동안 엄마와 아빠는 동네의 이런저런 소식들을 이야기하며 반색하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했다. 할머니는 간간이 대화를 거들기만 할 뿐 대화에 본격적으로 끼지는 않았다. 서린은 고등어 눈알을 빼먹느라 진은 고등어 껍질만 벗겨 먹느라 어른들의 이야기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들어도 이해하지도 못할 얘기들이었다. 고등어가 반 정도 남았을 때쯤 막내에게 분유를 다 먹인 엄마는 그제야 숟갈을 들었다.
“그런데 고등어구이는 소금만 뿌려서 구워도 맛있지만, 간장으로 양념장 만들어서 찍어먹어도 맛있는데…….”
아빠가 젓가락으로 고등어 꼬리를 뜯으며 말했다.
“아침부터 양념장까지 만들 시간이 어디 있어요? 국 끓이고 고등어 굽고, 얼마나 바쁜데.”
“그거 만드는 거야 5분도 안 걸리는데, 금방 하지.”
“그러면 당신이 만들어 먹어요.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말만 하는 게 얼마나 얄미운지 알아요?”
“싸우지 마요. 왜 또 싸워요.”
분위기가 안 좋아지려하자 서린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언제 싸웠다고 그래?”
엄마가 말했다.
“아까 싸웠잖아요.”
“그건 싸운 게 아니라 대화한 거지.”
이번엔 아빠가 대답했다.
“맨날 싸우면서 안 싸웠다고 하고. 그치, 진아?”
“아니라고 하는데 아닌가보지.”
편을 들어주길 바라고 물은 거였지만 진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너 왜 내 편 안 들어? 싸운 거 맞잖아.”
“그만해라, 좀.”
결국 또 엄마가 대화를 끊어야 다시 식사 시간이 되었다. 서린은 남은 밥을 다 먹을 동안 진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진은 막내 동생이 자꾸 봐도 귀여운지 동생에게 관심을 쏟느라 서린이 토라진 것은 관심 밖이었다.
조용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요란하지도 않던 아침 식사가 끝나고 다들 제 할 일을 찾아갔다. 엄마는 밥 먹은 것들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아빠는 옷을 갈아입고 밭에 갈 채비를 했다. 할머니는 벌써 마당에 나가 정성스레 고사리를 하나하나 널고 있었다. 그 사이 서린과 진은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서린과 진이 현관을 나서며 동시에 말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학교 앞의 어린이 보호용 가드펜스에는 얼마 전부터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현수막에는 ‘마을안길 도시가스관 매설 반대’라고 쓰여 있었다.
“언니, 도시가스가 뭐야?”
진이 서린에게 물었다. 그러나 서린도 도시가스가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집에서 쓰는 LPG와 다른 건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것도 모르냐? 맨날 물어보지 말고 너가 찾아봐.”
서린은 아침의 일도 있고 괜히 지는 기분이 들어서 모르는 걸 차마 모른다고 하지 못하고 진이를 무시하듯 말했다. 진이는 기분이 상했는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진은 1층의 3학년 교실로 가고 서린은 2층의 5학년 교실로 갔다. 학교에서의 시간이 거의 유일하게 서린과 진이 떨어져있는 시간이었다.
종례가 끝나고 서린은 진과 함께 가기 위해 3학년 교실로 갔다. 진의 담임 선생님은 항상 말이 많아서 종례도 한참 걸렸다. 불량식품 사먹지 말아라, 숙제 잊지 말고 해 와라, 공부는 이래서 열심히 해야 한다 등 늘 비슷한 말이어서 아이들 눈에는 선생님이 그냥 빨리 끝내주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도 비슷한 레퍼토리를 읊고 가정통신문을 나눠준 후에야 끝이 났다.
교실에서 나온 진은 아침의 일로 아직 토라져 있었다. 서린도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군것질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진이 돈을 가져오지 않아 안 된다며 거절하자 서린이 책가방 앞에 달린 주머니에서 2천 원을 꺼내 보였다.
“내가 사줄게. 그니까 가자.”
“진짜? 얼마나 사줄 건데?”
“2천 원이니까 천 원씩 사먹자.”
“음, 그래.”
군것질할 생각에 서린도 진도 아침의 일은 잊어버렸다. 큰 글씨로 ‘슈퍼’의 ‘퍼’라고 쓰여 있는 문을 열자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다.
“안녕하세요.”
슈퍼 아줌마는 다른 두 아줌마와 이야기하느라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했다. 평소 서글서글하게 웃던 슈퍼 아줌마가 웬일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서린의 부모가 얘기하던 주제가 여기서도 얘기되고 있었다.
“그 도시가스가 등유 같은 것보다 훨씬 싸서 좋대요.”
“맞아요. 그런데 그걸 왜 하필 마을 안으로 지나가게 하는 건지…….”
“그래도 이미 결정된 일을 어쩌겠어요.”
“재환이네랑 몇몇은 돈을 모아서 변호사까지 선임해 막겠다던데요?”
“이미 공사는 시작됐는데 그런다고 달라지겠어요?”
서린과 진은 진지하게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느라 아줌마들의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린은 자잘한 불량식품으로 천 원을 채웠고 진은 과자 한 개를 골랐다. 합판으로 된 계산대에 고른 것들을 올리고 2천 원을 냈다. 아줌마는 거스름돈을 주며 잘 가라고 인사해주었다. 평소 아줌마의 표정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아이들은 인사하며 슈퍼를 나왔다. 서린은 불량식품들을 바지 주머니에 나눠 넣고 도장 모양으로 생긴 사탕을 깠다. 인주를 찍는 부분이 초록색, 빨간색, 보라색, 파란색인 것 4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서린은 가장 좋아하는 초록색을 고르고 진에게도 하나 고르라며 내밀었다. 진은 빨간색을 골랐다. 둘은 사탕을 입에 물고 기분이 좋아져서는 쭐레쭐레 집으로 향했다. 남은 사탕 2개는 밤에 몰래 진과 하나씩 나눠 먹었다.
옆방에서 막내 동생이 우는 소리에 서린과 진이 새벽부터 잠에서 깼다. 엄마가 달래서 막내는 다시 잠들었지만 서린은 이미 잠이 달아나버렸다. 진은 서린과 말벗을 하며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잠이 들었고 서린만 다시 잠들지 못했다. 동이 틀 무렵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곧 아침 시간이 되어 진이 언니를 부르며 흔들어 깨웠지만 서린은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서린이 잘 만큼 자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11시가 거의 다 돼 가던 시간이었다. 집안에는 텔레비전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마루로 가 보니 진이 텔레비전을 보며 접이식 상에서 학습지를 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일이 학습지 선생님이 오는 날인데 서린은 학습지를 반도 풀지 않았다. 서린의 한숨 쉬는 소릴 듣고 진이 돌아봤다.
“언니 일어났네?”
“응. 엄마, 아빠랑 할머니는?”
“엄마는 애기랑 이모 만나러 가고 아빠는 농약 치러 간댔나? 그리고 할머니는 노인정에 가셨어.”
“나 빼고 다 바쁘네.”
“언니도 학습지 해야지. 난 이제 다 했다.”
“밥 먹고 하면 되지. 넌 배 안 고파?”
“응. 아침 먹고 시리얼도 먹어서 괜찮아. 그리고 난 이따 지후 오면 놀러 갈 거야.”
“그럼 점심은?”
“안 먹고 갈 건데?”
“알겠어.”
서린은 혼자서 뭐라도 먹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밥상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냉장고를 열려고 보니 냉장고 문에 쪽지가 붙어있었다.
‘냉장고에 반찬이랑 냉국 있으니 꺼내 먹고 학습지 풀고 놀아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밀폐용기에 담긴 냉국과 반찬들이 있었다. 하지만 서린은 딸기맛 요거트를 집었다. 뚜껑에 묻은 것부터 혀로 핥고는 밥숟갈로 요거트를 떠먹었다. 평소 티스푼으로 먹던 걸 밥숟갈로 먹어서 그런지 요거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린은 요거트를 하나 더 꺼내고는 마루로 갔다. 진은 학습지를 다 풀고 상을 접고 있었다.
“상 안 접어도 돼. 내가 쓸 거야.”
“응. 그래.”
진이 접던 것을 다시 폈다. 네모나고 작은 상 위에 서린이 요거트를 올려놨다. 그리고 방에서 수학 학습지와 영어 학습지를 들고 와 잠시 고민하다가 수학 학습지를 펼쳤다. 진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마저 보고 있었다. 진이 보던 만화가 끝나자 다른 만화의 재방송이 이어졌다. 요거트를 먹으며 서린도 같이 텔레비전을 봤다. 학습지를 푸는 시간보다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언니, 학습지 안 해?”
만화 주인공의 대사 사이로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제 할 거야. 이것만 보고 하려고 했어.”
열심히 풀려고 했는데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것은 진이었다. 자기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학습지를 해놓고……. 생각해보니 얄미웠다. 하지만 웬일로 서린은 조용히 넘어갔다.
“내가 언니니까 참아줄게.”
“응?”
맥락 없는 서린의 말에 진은 의아했다. 하지만 괜히 여기서 더 말을 했다간 또 싸우게 될 것 같았는지 더 묻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이야! 나 왔어.”
옆집 지후와 그녀의 사촌언니인 미례가 진에게 같이 놀자며 찾아왔다.
“서린이도 있었네? 너도 같이 갈래?”
미례가 물었다.
“뭐하고 놀 건데요?”
“글쎄, 그건 아직 안 정했는데.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서린이 고민하려는 찰나 진이 말했다.
“언니는 학습지 풀어야 되잖아.”
진이 서린의 고민을 끊어버렸다.
“갔다 와서 하면 되지.”
“그러면 내일까지 다 못 풀 걸?”
“풀 수 있거든!”
“언니 맨날 그렇게 말해놓고 안 하잖아.”
너무 맞는 말이어서 서린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결국 진만 엄마에게 전화로 허락을 받고 나갔다. 서린은 텔레비전을 끄고 학습지를 푸는 데 집중했다. 2장을 풀고 나니 서서히 졸려오기 시작했다. 수학에서 영어 학습지로 바꿔서 풀어도 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제각기 어디론가 가버리고 진이도 놀러나가 집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서린은 방으로 스멀스멀 들어가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천장에 붙은 야광별은 누리끼리한 색을 뽐내며 반들거렸다. 누운 채로 손을 뻗어 별을 떼는 시늉을 하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네모난 창 안으로는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몽실몽실하니 딱 베갯솜 같았다. 창문을 타고 넘어 들어오는 데워진 바람과 살짝 썰렁한 바닥의 온도 차는 서린을 더욱 졸리게 했다. 몽실몽실한 구름이 떠가는 것을 보던 눈이 몇 번 껌뻑이더니 감겼다.

3. 열 살
세게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와 말소리에 서린이 잠에서 깼다. 밖이 어두워져 가는 걸 보니 반나절은 족히 잔 듯했다. 불현 듯 마루에 펼쳐놓고 다 풀지 않은 학습지가 떠올랐다. 변명이라도 해볼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밖이 평소보다 시끄러운 것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익숙한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이 섞여 보였다. 서린은 얼른 숙여 앉고는 눈만 빼꼼 내밀어서 바깥을 다시 한 번 봤다. 아빠가 나가 무슨 말을 하자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돌아갔다. 몇몇 사람도 아빠와 잠시 얘기를 하고는 떠났다.
아빠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서린은 살며시 문을 열고 마루를 봤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있었는데 벌에 쏘인 것처럼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웬일인지 작은 이모도 와 있었다. 아빠는 같은 자리를 왔다 갔다하며 고개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했다.
할머니는 방문을 활짝 연 채로 막내를 안고 있었는데, 기분 탓인지 할머니의 손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 방의 불이 꺼져 있어서 할머니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별안간 엄마가 작은 이모를 와락 안으며 펑펑 울었다. 이모가 엄마를 달래며 밖으로 나갔다. 서린이 천천히 문을 더 열고 아빠한테 다가갔다.
“진이는 아직 안 왔어요?”
아빠의 축 늘어진 고개가 서린을 향해 돌아갔다. 새빨간 아빠의 눈에 서린이 흠칫 놀랐다.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엄마와 이모가 다시 들어왔다. 엄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서린은 왠지 모르게 무서워졌다. 뭔가 무서운 일이 우리집을 덮친 것이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벌벌 떨고 울 만큼 무서운 일이…….
서린은 다음날이 아침이 되어서야 그 무서운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아빠가 말해주기 전에 서린은 어젯밤부터 눈치를 챘는지도 모른다. 새액새액거리는 자장가 같은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이미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옆집아이, 그녀의 사촌, 그리고 진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저 물놀이가 하고 싶었던 건지, 그도 아니면 올챙이가 잡고 싶었는지 그들은 마을 어귀의 하천으로 향했다. 하천이라고 해도 건천이어서 물이 항상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바위가 움푹 파인 곳마다 물웅덩이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큰 것은 웅덩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도 하고 보기에는 물이 맑고 얕아 보이는 곳이 웬만한 어른 키보다 깊기도 했다.
아이들끼리 그곳에 간 줄도 몰랐을 뿐더러 도시가스관을 매설하는 공사로 하천 중간에 공사 자재들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재 너머로 갔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 안에서 아이들이 사라진 것을 안 후에도 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아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셋 중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명이 빠지자 나머지 아이들이 그를 구해주려다가 모두 빠져버린 것 같다고 장례식장에서 밥을 먹던 어른들이 말했다. 서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얘기를 하는 어른들이 미웠다.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잘도 밥을 먹는 입들이 괴물 같았다. 자신과 진만 집에 두고 나갔던 가족들이 원망스러웠다. 혼자 엄마에게 안겨 따라 나갔던 막내 동생을 흘겨봤다.
그리고 학습지를 미리 하지 않아서 같이 가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고 꼴 보기 싫었다. 우겨서라도 같이 갔어야 했다.

 내가 갔다면 진이를 꺼낼 수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 빠지기 전에 잡았을 거야, 어쩌면 셋이서 한 명을 구해냈을 거야. 끝없는 가정법의 문장들이 서린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불가능한 가정들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만약을 덧붙인들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그저 자기 위안이요 현실도피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렀다. 진이의 귀양풀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심방이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자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때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울었나? 까무러졌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며칠간의 기억이 성긴 그물처럼 존재했다. 그물 사이사이 빈 부분은 다시 채워질 수 없었다.
며칠 쉬었던 학교를 다시 나갔다. 친구들은 아무 말이 없었고 선생님은 가엽다는 듯이 쳐다봤다. 수업을 들은 것 같지도 않은데 종례가 끝났다. 학교 앞의 현수막은 그대로 붙어있었다.
‘미안, 나도 도시가스가 뭔지 몰라.’
솔직히 말할 걸 그랬다. 괜한 자존심을 부렸다. 사실 나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 진이는 알 수가 없다. 앞으로도 알 수가 없다. 별 것도 아닌 일들이 다 떠올랐다. 슈퍼 앞을 지나는데 슈퍼 아줌마가 와서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다. 괜찮다며 거절하고는 웃어 보였다. 아줌마의 눈에 그게 웃는 것처럼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집에 와 학습지를 풀고 막내를 돌보고 할머니와 텔레비전을 보며 진이 없어도 일상은 반복되었다. 진이가 죽은 후 서린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눈물샘이 막혀버린 건지 울고 싶어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아이는 그런 자신이 무섭기까지 했다. 욕실바닥에 물이 넘치도록 고였는데 하수구가 막혀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매일 비라도 퍼부으면 조금이나마 속이 풀릴까 싶은데 일기예보는 늘 맑음이었다. 흐림조차 없었다.
진의 49제가 끝났다. 아빠는 49제가 끝나고 나면 진이의 영혼이 땅에서 완전히 떠난다고 했다. 거짓말, 진이는 이미 49일 전에 떠났는데 어떻게 떠난 아이가 또 떠난다는 건지 서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도 서린은 야광별을 세며 잠이 들려 애썼다. 아무리 세어 봐도 잠이 오지 않자 오늘도 어둠의 틈에서 파란 점과 빨간 점들을 끄집어냈다.
책장의 모서리에서 문손잡이로 시선을 옮김에 따라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점들을 곁눈으로 쫓았다. 그러나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잠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자꾸 점들을 놓쳐서 그런 걸까, 아니 전에도 중간에 점들을 보다 놓친 적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눈이 말똥말똥하진 않았다. 결국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잠이 든 서린은 막내가 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였다. 아침도 거른 채 책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섰다.
“오널도 ㅎㆍㄱ?교 감댜?(오늘도 학교 가니?)”
마당 한편에 놓인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물었다.
“네,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토요일은 어제였다.
“아, 오늘은 안 가요. 오늘이 토요일인 줄 알았어요.”
“기가? 게믄……. (그러니? 그러면…….)”
할머니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것 같았지만 서린은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구석에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버렸다. 갑자기 머리에서부터 피가 밑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에서 내려간 피는 손끝과 발끝을 통해 몸 밖으로 나가버리는 걸까? 손부터 힘이 풀렸다.
잠이 부족한 탓이려니 하며 양말만 벗고 얼른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햇살 때문에 눈을 감아도 눈앞이 빨갰다.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는 굼벵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포근하고 따스한 이불의 품에 안겨 잠들어있던 서린을 깨운 것은 햇살이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이 부실 만큼 따사로운 햇살이 방안을 비췄다. 하루를 통째로 자고 다음날이 돼버린 걸까? 서린이 창밖을 보니 해가 잠들기 전과 똑같은 자리에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면 배가 덜 고프는 것일까? 24시간을 굶었을 터인데도 배가 고프질 않았다. 집안은 고요했고 창밖에는 유월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서린은 맨발로 운동화를 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집에는 서린뿐이었다. 50일 전의 그날처럼.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어디로든 가야만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등 떠미는 대로 서린은 못 이기는 척 골목을 지나 길가로 나갔다. 무작정 나오긴 했지만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인도 위에는 여기저기 까만 버찌가 떨어지고 짓밟혀 불규칙한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아직 터지지 않은 버찌를 골라 밟으며 버찌를 따라갔다. 버찌 무늬가 끊기고 새로운 길목에 다다랐다.
그 길을 보니 진과 함께 부모님을 찾아서 밭까지 갔던 일이 생각났다. 혼자서는 가본 적 없는 길이었다. 늘 부모님이나 할머니 아니면 진과 함께였다. 서린은 손바닥을 바지에 쓱 닦고 주먹을 쥐었다.
분명 몇 번이나 가본 익숙한 길일 텐데도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걷고 또 걸으며 나아갔다.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 같은데 서린은 아직도 가는 중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도 길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제자리에서 걷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다행히 착각은 착각일 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밭에 도착한 것이다.
입구에서도 밭 안쪽의 푸릇푸릇한 싹과 모종들이 보였다. 잡초들마저 초록으로 물들어 주변이 온통 싱그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밭에 가자던 목표를 달성하고 하니 목표가 상실되어 버렸다.
밭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서린이 밭담을 따라난 좁은 길로 눈길을 돌렸다. 그 길을 따라가면 무엇이 나오는지는 알지 못했다. 서린이 가본 최대 범위는 밭이었다. 오늘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그 길은 어린아이 두 명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길 가운데만 흙이 드러나고 그 좌우는 이름 모를 잡초와 조그마한 풀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평소 같았다면 집에 따 가지고 갔을 아기자기한 풀꽃도 오늘은 서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걷는 것만이 목적인 듯 주위도 둘러보지 않고 걸어갔다.
유월의 햇살은 생각보다 뜨거웠고 서린의 등을 떠밀던 바람은 그친 지 오래였다. 점점 걸음이 느려지던 서린이 드디어 멈춰 섰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내쉬며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금 있는 곳이 자신의 동네인지 옆 동네인지도 구분이 안 되었다. 혼자 여기까지 걸어 나온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서린의 세상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 90%였고 나머지 10%가 시내를 비롯한 다른 마을들이었다.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는 아이에게 텔레비전에 나오는 서울이니 미국이니 하는 곳들은 그저 텔레비전 속 세상일 뿐이었다. 그곳들은 피터팬의 네버랜드처럼 현실이 아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서린의 눈에 예쁘게 꽃이 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봤을 땐 붉은 연꽃처럼 생긴 작은 꽃인가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나무 아래 떨어진 것을 보니 실 같은 꽃잎이 모여 꽃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자귀나무였다. 아빠가 ‘자귀나무 아래서 자면 귀신 꿈을 꾼다’는 얘기를 하며 자귀나무를 알려준 적이 있지만 한 번 들은 그 말을 아이는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한다해도 그것이 이 나무인 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서린은 쪼그려 앉아 떨어진 꽃들을 보았다. 실 같은 꽃잎이 다 흩어져버린 것도 있고 나무에 붙어있던 모양 그대로 떨어진 것도 있었다. 모양이 온전한 것만을 골라서 몇 개 줍고는 나무에 기대앉았다. 여기까지 계속 걸어왔던 탓인지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맺혔다. 나무에 기댄 등도 축축했다. 바람이 불 때면 등이 잠시 시원했다가 다시 끈적해졌다.
들고 있던 꽃들을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평소 덤덤한 진이도 이 꽃을 본다면 분명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하겠지. 바람이 불어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새액새액거리던 진의 숨소리를 닮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밤도 아닌데 파란 점과 빨간 점들이 원을 그리며 나타났다.
“언니, 언니? 그새 잠든 거야?”
“응? 진이? 어떻게 여기에……?”
“무슨 소리하는 거야. 학습지 풀다가 졸더니, 꿈 꿨어?”
“꿈?”
“무슨 꿈을 꾼 거야?”
“무슨 꿈이더라……. 모르겠어. 생각이 안 나는데?”
“에이, 뭐야. 학습지는 다 풀었어?”
“아니, 아직 멀었어. 조느라 못 풀었더니.”
“그럼 그건 나중에 풀고 같이 갈래?”
“같이? 어딜?”
“지후랑 미례언니가 같이 놀러가자고 왔거든. 언니도 같이 가자.”
“학습지 많이 남았는데……. 놀고 와서 풀어도 되겠지?”
“엄마가 혼내면 내가 같이 가자고 졸랐다고 할게. 같이 가자, 응?”
“그래. 놀고 나서 생각하지 뭐.”
“좋아!”
서린은 생각나지 않는 꿈은 잊어버리고 진이, 지후, 미례와 함께 학교 놀이터로 갔다. 미끄럼틀에서 탈출놀이도 하고, 누가 가장 높이 올라가나 겨루며 그네도 타고, 정글짐에서 술래잡기도 하며 넷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러다 미례가 용돈을 받았다며 아이스크림을 사줘서 넷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씩 물고 그늘에 앉아 쉬었다.
“이번엔 뭐하고 놀까?”
넷 중 큰언니인 미례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우리 거기 놀러갈까? 그 마을 아래 있는 내[川] 있잖아.”
지후가 먼저 의견을 냈다.
“근데 거긴 어른들이 위험하다고 애들끼리 가지 말라던데.”
진이 말했다.
“맞아. 거기 말고 다른 데 가자.”
서린이 거들었다.
“다들 선녀다리에 가보고 싶지 않아?”
“선녀다리?”
지후의 말에 셋이 동시에 답했다.
“응. 그 내[川]를 따라서 계속 가다보면 선녀다리라는 다리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소원을 빌고 그 아래를 지나면 진짜로 이루어진대.”
선녀다리가 불러일으킨 호기심은 모두의 머릿속에서 어른들의 당부를 지워버렸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동요도 부르고 요즘 유행하는 가요도 흥얼거리며 하천으로 향했다. 하천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 주변에는 하얀 찔레꽃과 인동꽃이 만발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찔레꽃이 예쁘다며 하나씩 따서 들고 가는데 진은 인동꽃 향이 좋다면 인동꽃을 땄다. 인동꽃을 따느라 내려오지 않는 진을 서린이 재촉했다. 진은 한 손에는 인동꽃을 가득 들고 한 손으로 계단 옆에 설치된 안전줄을 잡으며 급히 내려오다 꽃을 계단에 모두 쏟아버렸다.
“언니 때문에 빨리 오다가 꽃 떨어뜨렸잖아.”
진이 떨어진 꽃을 주우며 서린을 탓했다.
“알겠어. 미안해. 대신 이따 돌아갈 때 같이 더 많이 따줄게.”
“진짜지? 약속해.”
“그래. 약속.”
서린이 진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앞서가는 지후와 미례를 따라 조심조심 뛰어갔다. 온통 바위투성이라 길이 험했다. 사실 하천 밑에는 길이라 할 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바위 사이사이의 크고 작은 물웅덩이를 피하며 하천의 상류쪽으로 갔다.
작은 물웅덩이의 소금쟁이와 올챙이를 구경하며 쉰 아이들은 다시 일어나 상류로 향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났다. 하천 중간에 웬 공사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쌓인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이것을 넘어가도 될까 싶었다.
“선녀다리가 진짜 있긴 한 걸까?”
미례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거 넘어가면 안 될 거 같지 않아?”
서린이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아냐, 선녀다리 진짜 있어. 고지영이 갔다 왔다고 엄청 자랑했단 말이야.”
지후가 언니들에게 조르듯이 말했다. 아이들은 지후를 믿어주기로 하고 한 명씩 차례차례 커다란 파이프 같은 것을 넘어갔다. 막상 넘고 나니 별 것 아닌 것에 괜히 겁을 먹었다며 아이들은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들은 다시 다리를 찾아 하천을 따라 걸어갔다. 그리고 선녀다리의 존재를 의심했던 아이들의 눈앞에 마침내 그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왼쪽 절벽위의 바위와 오른쪽 절벽위의 바위의 뾰족한 끝이 맞닿아 마치 하늘 위에 있는 다리처럼 보였다.
“저기인가 봐!”
진이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로 있네.”
먼저 선녀다리 얘기를 꺼냈던 지후도 눈이 동그래졌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녀다리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올라오는 웃음을 누르며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이제 소원 빌까?”
미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좋아!”
세 아이가 대답했다.
“우리 가족들 건강하게 해주세요.”
지후가 가장 먼저 소원을 빌고 무지개다리 밑을 통과했다. 지후의 소원을 들으며 서린은 무슨 소원을 빌지 고민했다. 자신보다 어린 지후도 가족들을 위한 소원을 비는데 용돈을 올려달라거나 숙제랑 학습지를 없애 달라고 비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다. 서린은 다른 소원을 고민했다.
“다들 너무 힘들지 않게 해주세요.”
뒤이어 미례도 소원을 빌었다.
“언니, 무슨 소원이 그래?”
서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지만 미례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우리 가족들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 사이 옆에 있던 진도 소원을 빌었다. 소원을 빈 진은 미례와 함께 다리 밑을 지났다. 사실 선녀다리를 보는 것만 기대하고 와서 갑자기 생각하려니 마땅히 떠오르는 소원이 없었다. 지후는 무슨 소원을 그리 오래 고민하느냐며 핀잔을 주는 척 장난을 쳤다.
“잠깐만 기다려봐.”
아이들의 장난스런 핀잔에 서린은 열심히 소원을 고민했다. 다른 애들이랑 같은 소원을 하면 괜히 따라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서린이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로 소원을 고민하다가 눈을 떴는데, 사방에 자귀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실 같은 꽃잎들이 산들바람에 날리며 떨어졌다. 서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봤다. 하늘에서는 끝도 없이 꽃이 내려왔다.
다리 너머의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아이들은 없고 그 자리에 아이들이 들고 있던 찔레꽃과 인동꽃만이 남아 있었다. 서린이 급히 다리 밑을 지나려는 찰나 눈앞에서 다리가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자귀꽃은 어느새 비로 바뀌어 내렸다.
서린의 얼굴 위로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얼굴에 떨어지는 물을 닦으며 눈을 뜬 서린에게 자귀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허리를 일으켜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길을 떠난 후 도착한 그 자귀나무 아래였다. 정성껏 모아놓은 자귀꽃들은 아무렇게나 풀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자귀꽃을 다시 주웠지만 비에 젖어 축 늘어지고 뜯어졌다. 서린이 꽃을 집어 던지고는 나무 아래서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흙탕물이 고인 물웅덩이에서 발길질을 하며 우악스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무언가로 막혀있던 눈물샘이 뚫려버렸다. 진이가 떠나고 단 한 번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내리는 비만큼이나 눈물을 쏟아냈다. 웅덩이에서 진흙을 집어 들고 허공에 던지기도 하고 주변에 핀 서양민들레의 긴 모가지를 잡아 뜯기도 했다.
얼마 동안을 그러고 있었을까. 기진맥진해진 서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길 저편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있다! 저기 있어요!”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은 익숙하고 낯선 얼굴들 사이로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아빠는 우산도 우비도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무리를 해서인지 서린은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번엔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않았는데 하늘이 보였다. 굵은 빗줄기와 함께 자귀꽃이 서린의 왼뺨으로 떨어졌다.

3. 다시 서른두 살
서린은 이만 차로 돌아갔다. 이 하천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계속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집이 있는 마을 안쪽이 아닌 주로 밭들이 있는 마을 바깥쪽 길로 차를 돌렸다. 마을 바깥쪽에도 이제는 집과 건물이 제법 많이 들어섰다. 전에 아카시아가 많이 피던 밭에도 타운 하우스 같은 것이 떡두꺼비 같이 들어 앉아 있었다. 고향이 별로 변하지 않았다던 것은 서린의 착각이었다. 이곳은 생각보다 더 변해버렸다.
길은 갈수록 좁아졌으나 아슬아슬하게 차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서린은 ‘이 길이 이렇게 넓었나? 길을 잘못 들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왔을 때 이 길은 걸어서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이 길에 오니 진이가 절실히 떠올랐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보일 때가 되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둘러보니 자귀나무가 있던 자리엔 그 밑동이 덩그러니 있었다. 설마, 아닐 것이다, 저건 그것이 아니야. 내가 길을 잘못 든 게 분명해. 서린은 다시 차에 올라타 주변의 다른 길들을 돌아봤지만 아무리 봐도 아까 들었던 길이 서린이 기억하던 길이었다.
오랜만에 와서 길을 헷갈리는 것이라 되뇌며 집으로 차를 돌렸다. 집에 가니 어머니가 가장 먼저 서린을 반겼다. 연락도 없이 왔지만 어머니는 놀란 기색 없이 밥은 먹었냐며 물었다. 하지만 서린은 그에 대한 대답도 하지 않고 그 길에 대해 물었다.
“그 우리밭 옆으로 난 길?”
어머니가 되물었다.
“네. 그 길 따라서 가다보면 소나무 숲도 있고 자귀나무도 있고 그랬잖아요?”
“맞아. 그랬지. 그런데 거긴 작년에 주인이 바뀌어서 거기 뭘 지을 거라던데?”
어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 그래서 요즘 그 주변 나무들도 싹 베려고 하는 거 같던데. 이미 베고 있으려나.”
그때 집에 돌아온 아버지도 대화에 끼었다. 서린은 맥이 풀려버렸다. 집에 안 온 1년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여긴 늘 그대로일 거라고, 변하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었다.
서린은 며칠 동안 집에 틀어박혀 방언조사도 나서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린을 지탱하던 실들이 한 번에 끊어져버린 듯했다. 줄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방에 널브러져 있거나 그저 먹고 자며 막내 동생의 말에 대답을 할 뿐이었다.
 동생이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한 것은 고맙지만 전혀 기운이 나지 않았다.
“언니 그 나무가 우리 밭에 있던 것도 아닌데, 지금이 아니었어도 언젠간 없어졌을 거야.”
“너는 그 나무를 모르잖아.”
“나도 본 적 있어. 언니가 어릴 때 데려가서 보여줬잖아.”
“아니, 너는 몰라.”
“언니가 요즘 우리 동네를 모르는 거겠지. 어디 새로 건물이 들어서고 밭이 없어지는 데가 거기뿐인 줄 알아?”
서린은 내버려두라며 방에서 동생을 내보냈다. 그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웅크려 들어갔다. 자신의 고치를 만들고 그 안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났다.
갑자기 서린이 아버지의 차키를 빌리고는 지갑과 핸드폰만 챙기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집을 나섰다. 아버지의 트럭을 몰고 서린은 제일 가까운 철물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린이 원하던 것이 없었는지 빈손으로 나왔다. 결국 시내 근처의 큰 철물점으로 차를 몰았다. 철물점에서 나온 서린은 공사장에서 볼 법한 해머를 질질 끌고 나와 트럭 뒤편의 트렁크에 실었다.
트럭은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그러나 트럭은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마을 어귀의 하천에서 멈췄다. 지난번 차를 댔던 곳에 트럭을 세우고 서린은 해머를 챙겼다. 트렁크에서 해머를 내리다 하마터면 발을 찧을 뻔 했지만 서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기고 하천의 계단으로 향했다. 그 근처가 주로 사람들이 차를 타고 지나가는 곳이어서 다행이었다. 혹여나 지나가던 사람이 지금의 서린을 봤다면 하천에 내려가기도 전에 광인(狂人)으로 신고가 들어가 저지당했을지도 모른다.
서린이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어릴 적 꿈에서 아이들과 갔던 그곳이 가까워졌다. 서린이 온 이후 며칠 동안 비가 안 온 탓에 두꺼운 파이프를 덮고 있는 시멘트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흙탕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시멘트에서 회색인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20년 만에, 그날 이후 처음으로 하천의 허리를 동강 내고 있는 시멘트를 마주했다.
펜대만 잡을 줄 알던 손이 해머를 감아쥐었다. 자세를 낮추고 그것을 잡은 손이 어깨보다 뒤로 젖혀졌다가 크게 반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것이 있는 힘껏 시멘트를 때렸다. 그것은 몇 번이고 더 시멘트를 내리쳤다. 장갑도 끼지 않은 여린 손바닥의 껍질이 벗겨져나갔고 시멘트에서는 파랗고 빨간 점들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서린은 그런 것은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외면하는 것인지 하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해머를 내리칠 때마다 울리는 땅의 고동만을 오롯이 느꼈다. 해머의 끝에서 태어난 실금이 시멘트 위로 뿌리를 뻗어나갔다.
 <끝>

일러스트 김진솔(미술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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