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과 기성세대의 만남
과거선배들의 활동 기억
앞으로도 시화전 이어갈 계획
대학에서 적극 지원 기원

김 동 윤 국어국문학과 교수

지난 3월 30일부터 4월 15일까지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은 제주작가회의 시인들과 공동으로 제주대 정문 진입로에서 시화전을 가졌다. ‘그래, 다시 봄!’이란 제목의 그 시화전에 내걸린 작품들은 모두 4ㆍ3항쟁을 다룬 것들이었다. 학생 12명이 쓴 4ㆍ3 작품들이 시인들이 창작한 시편들과 함께 펄럭이는 천에 나란히 전시된 것이었다. “제주의 작가들은 문학으로 4ㆍ3의 금기 깨기를 실천했고, 제주대 학생들은 가장 앞장서서 진상규명을 외쳤으니,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정겹고 흐뭇한 만남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의 행사 취지문이 김기삼 작가가 제공한 제주대학생들의 4ㆍ3진상규명 집회(1989년) 사진과 더불어 시화 옆에 내걸렸다. 

이 시화전과 관련하여 적잖은 격려를 받았다.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고 보도해 주었다. 기성시인들과 대학생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행사라는 점에서도 주목되었겠지만, 대학생들이 4ㆍ3항쟁을 주제로 시화전을 갖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제주대학생들의 4ㆍ3진상규명운동은 역사가 깊다. 1960년 4ㆍ19혁명 직후 제주대학생 7명이‘4ㆍ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들은 <호소문>을 작성해 그것을 신문에 게재하고, 전단지로 배포하는 등의 진상규명운동을 전개했다. 비록 5ㆍ16쿠데타로 동지회 주도 학생들이 구속되면서 된서리를 맞고 말았지만, 그러한 제주대학생들의 열정은 4ㆍ3운동의 태동으로서 큰 족적으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사반세기 동안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아래서 4ㆍ3운동은 숨죽이고 있었다. 1978년 현기영이 <순이 삼촌>을 발표하며 4ㆍ3의 금기를 깼지만, 그것이 운동의 차원으로 실천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바로 제주대학생들이 과감히 돌파하기 시작했다.

제주대 총학생회에서는 1986년에 학생회관에 4·3 분향소를 기습 설치하는가 하면, 1987년에는 제주도내에서는 처음으로 4ㆍ3 위령제를 갖기도 했다. 1988년에는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자치기구들이 4ㆍ3추모기간을 정해놓고 행사를 가지면서 옴팡밭 부근에 방사탑도 세웠다.  추모기간 마련이나 방사탑 건립이나 모두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89년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린 ‘제41주기 4ㆍ3 추모제’는 제주도에서 열린 첫 대중적 4ㆍ3 추모행사로 기록되는데, 이때에도 제주대학생들이 교내에서 집회를 하고 벚꽃 길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인 후에 시민회관 행사에 참여했다.

이후부터는 제주대학생들만이 아니라 사회운동 차원에서도 4ㆍ3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시점인 2000년에 드디어 4ㆍ3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면서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는 등의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듯 4ㆍ3운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제주대학생들이 있었다.

국어국문학과에서는 앞으로도 4ㆍ3시화전을 이어갈 계획이다. 학생들은 시화전 참여를 바탕으로 4ㆍ3문학의 새로운 주역이 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경주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다른 분야의 4ㆍ3 행사들도 제주대학교에서 풍성하게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노래 공연, 마당극 공연, 미술 전시, 사진 전시, 학술발표 등이 함께 열리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4월마다 ‘4ㆍ3청년축전’이 제주대 벚꽃 길과 교정에서 개최되기를 희망한다.  비장한 투쟁의지만을 다지자는 것이 아니라 촛불집회처럼 함께 즐기면서 4ㆍ3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이다. 총학생회가 제주민예총 등과 협력하면서 기획한다면 멋들어진 한마당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대학본부에서는 학생처를 중심으로 청년축전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줘야 한다. 제주도청이나 4ㆍ3평화재단에서도 흔쾌히 지원해 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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