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사월이 오고 있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듯 계절은 틀림없다. 일흔여섯 해가 지났다.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특별법 전부 개정과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까지 이뤄지고 있다. 괄목할 만한 진전이다. <순이 삼촌>(1978년)을 썼다는 이유로 필화사건에 휘말렸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경천동지’다.

하지만 제주 4ㆍ3 진상규명의 ‘제도화’가 진정한 과거 청산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제주 4ㆍ3특별법을 비롯한 과거사 관련 법안들이 추상적이고 도덕적 수준의 명예 회복을 내세우면서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공허한 수사’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며칠 전 제주를 찾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현재 제주 4ㆍ3 특별법의 정의 규정에서 ‘소요 사태’를 개정해달라는 건의를 받았다고 밝혔다. 화해와 상생 나아가 정명의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시점에서 특별법의 ‘소요 사태’라는 규정은 여전히 제주 4ㆍ3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생존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이 실시되고 있지만 여전히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른바 ‘배제자’의 등장은 2001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봉기 주체 세력을 희생자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헌재는 “수괴급 공산 무장병력 지휘관 또는 중간 간부로서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대항한 자, 모험적 도발을 직간접적으로 지도 또는 사주함으로써 제주 4ㆍ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기타 무장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 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제헌 선거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와 같은 이들은 ‘희생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재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무장봉기 세력의 행위를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부정하며,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북한 공산정권에 대한 지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헌재가 말하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는 1972년 유신 헌법 전문에서야 등장한다. 1948년 제헌헌법과 1954년 개정헌법에는 이러한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개념이 분단 체제와 독재정권이라는 역사성에서 ‘발명’된 것임을 보여준다.

제주 4ㆍ3항쟁이 해방기 남북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이러한 헌재의 규정이 4ㆍ3 특별법에 제정 취지에 부합된다고 보기 힘들다. 제주 4ㆍ3의 제도화가 오히려 법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현실에서 제주 4ㆍ3항쟁의 역사적 복원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2000년 제주 4ㆍ3 특별법 제정 이후 2024년까지 9차례의 개정(이 중 전부 개정 1회 포함)이 진행되었다는 점은 법이 여전히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라는 법적 외부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고, 그 외부의 영역은 여전히 법의 이름으로 소환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7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4ㆍ3이 ‘운동’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김없이 사월이 오듯, 우리의 사월도 끊임없이 새로워야 할 때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